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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늦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여사가 2011년 9월
25일에 별세했다. 향년 93세.
비보에 접해서 슬픔과
애석함을 금할길 없는
동포의 한사람으로서 필자는 마음속으로부터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
여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생전에 고인이
여러번 옥중에 갇혔던
남편 문 목사의
옥바라지를 꾸준히 한데
대해서와 여사 자신도
문 목사 못지
않게 통일에 기여한데
대한 내용을 소개하며
기리는 글들이 언론
등에서 많이 등에
소개되었으므로 필자는 그같은
내용에 대해는 구태어
되풀이 쓰지 않겠다.
그동안
e6.15통일시대f라고
불리울 만큼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기운과
평화, 번영의 기운이
높아가서 마치 통일이
사람들의 눈앞에 다가온듯한
시기도 있었고, 그것이 다시
과거 대결시대로 되돌아가
버리고 남북 사이에
포탄이 날아갈 만큼
상황이 악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 동안에도
이남에는 동족을 적대시하고
겨레의 통일 염원과
지향을 범죄시하는 악법은
변함 없이 계속
존재해 왔었다.
실은 필자는 1992년에 지어낸
책
w인간 문익환x(일본 츠게쇼보) 덕분에 박용길
여사와 서로 알게
되었는데, 그후 두
사람 사이에 편지도
몇번 오갔었다. 그리고 우리는
도쿄와 서울에서 직접
만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반통일악법
때문에 이 일들은
오늘까지 공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우리
앞에는 고인이 생전에
통일을 위해서 이룩한
업적들을 하나라도 많이
사람들에게 알리며 그
뜻을 모두가 이어가야
하니 비록 필자와
고인 사이의 자그마한
추억도 더는 감추어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고인과의
사이에 처음으로 오갔던
편지, 정확히는 고
문익환 목사의 5주기(1999년)에 즈음해서 필자가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써서 발표한
글과, 이 글을
본 박용길여사가 필자에게 처음으로
보내준 편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께
문익환 목사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1989년 4월, 평양에
가셨다가 서울에 돌아가시는
도중 일본에 들리신
목사님께서 도쿄 와세다에
있는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셨을
때 목사님의 바로
앞에 앉았던 재일동포
기자입니다.
그때부터 벌써 10년이
지났고, 또한 목사님께서
가신지 5년이 됩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저승이란 어떤 곳인가요?
그곳에서도 사상이나 체제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다투거나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그 나라
사람들이 알아서 하는
일에 간섭하는 일이
있습니까?
영혼이 된 동포들은
그곳에서도 분단되어 있습니까?
생전에 마지막 옥중생활을
보내시면서 손녀에게 보내신
편지안에서 옥살이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하셨던
목사님이시니 혹시 그곳에서도
낙천적으로 지내고 계시는지요?
꺿이는 해라서 서울에서는
무슨 행사가 열리는줄로
알았습니다만 부인이신 박용길
장로님께서 그런 계획이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니 저도
아무것도 쓸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기일인 1월 18일,
서울에서는
g평양가는 차표를
다오h라는 주제밑에 서울을
출발하신
e늦봄호f 열차가
휴전선을 넘어서 평양에
가닿는 내용의 가상극이
상연되었다지 않습니까.
목사님의 육성이 장내에
흐르던 가운데 가상극이
진행되었다고 전한 기사를
본 저는 그
장면을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이고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문 목사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에
대해서
g민주화·통일 운동의 지각생h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목사님의
호 늦봄도 거기에
유래한다지요?
그때까지는 구역성서 번역에
몰두하셨던 목사님께서, 과거에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냈으며
g모든 통일으 선이다h라고
말한 장준하의 영향으로
민주화·통일 운동에 나서게
되신 것은 1976년에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내용으로 된
e3.1민주구국선언f을 기초하셨을 때부터였습니다.
아버님이신 문재린 선생의
영향으로 목사가 되시고,
죽마고우 윤동주의 영향으로
시인이 되신 목사님께서는
이때부터 스스로를
e장준하의
대타f라고 하시여 민주·통일
운동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e문익환f이라는
이름에 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
무렵에 첫 옥중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훗날 유명해진
박용길 장로님과의 편지
교환 역시 이때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아직 풋내기 기자라서
옥중에 계신 목사님과
바같사회에 계신 박
장로님 사이에
g당신의
사랑 늦봄h,
g당신의 봄길h이라고,
간수도 부러워할 정도로
편지가 오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리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제가 문익환이라는
인물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통일이라는 테마를
추구하게 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목사님의 역사적인 방북때부터였습니다.
지금도 이따금씩 목사님께서
평양을 찾으셨을 때
기록들이 수록된 비디오를
보면서 혼자 감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만,
목사님께서 량손을 높이
드시고 김일성 주석에게
다가가시고는 두 분이
뜨겁게 포용하고 악수를
나누셨을 때 장면은
볼 때마다 감동입니다.
g분단 50년을 넘기지
마십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치욕입니다.h
g좋습니다. 잘 하면
되겠지요h
이것이야 말로 저
역사적인 회담의
집약이자 결론이었다고
말할 수 없을까요?
북을 이끄는 공산주의자와
남의 종교계 거물이
서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회담 석상에서
연방제를 한꺼번에 하겠는가
아니면 단계적으로 하겠는가,
남북관계에서 정치, 군사
문제의 해결을 우선해야겠는가
아니면 여러 분야의
교류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겠는가 등의 문제를
놓고 기탄없는 논의가
진행되고, 심지어는 화제가
주체사상을 둘러싼 논쟁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두 분
사이의 신뢰가 더
두터워진 것은 모두
분단 50년을 넘기지
말자고 하는 합의가
처음에 벌써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앞으로 남북의
당국자나 각계각층이 대화나
회담을 할 때
서로가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되겠는가를, 두 분은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목사님의 방북과 김
주석님과의 회담의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만 목사님
생각은 어떠하신지?
그만한 쾌거를 이루어내신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종교인이자
시인이고 통일운동가이기도 하셨지만 그전에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통일염원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e인간
문익환f으로서
저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셨습니다.
도쿄의 기자회견장에서 땀을 흘리면서
정신 없이 메모와
녹음을 하다가 제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우연히 목사님과
눈이 맞았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g파이팅h이라고 말씀하시듯 미소를
띄워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에게
있어서 목사님과의 첫
만남이자 목사님의 팬이
된 계기였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목사님의 5주기에 즈음해서
서울에서 출판된
w늦봄
문익환전집x이 며칠전에 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생전에 쓰시거나
말씀하신 자료들과 창작하신
작품들을 책으로 엮으면
12권의 대작이 되구만요.
두권의 시집과 세권의
통일논의, 그리고 한권의
에세이, 세권의 옥중서한,
그리고 신학에 관한
것이 두권과 설교가
한권
c
그 방대함과 외모의
근사함에 감동하면서 책을
펼쳐보니 현물은 이미
변색했을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진들이 편집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목사님의
생애와 인품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떠
오릅니다.
1980년대 후반기부터 남,
북, 해외를 불문하고
겨레들속에서 통일기운이 전례없이
높아가고 그것이 도중에
남북의 유엔가입이라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국가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관계이며, 7.4공동성명에서 제시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재확인한다소
서문에 명기된 남북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발표되었던
나날이.
그러한 가운데 문
목사님의 역사적인 방북이
단행되었으며,
또한
g통일은 다
됐어h 등의 명언이
피로되었습니다.
사실 목사님 말씀대로
그 무렵에 남북
축구경기와 합동음악회, 탁구 통일팀이
실현되고 스포츠와 예술이라는
분야에 한정되기는 했습니다만
남, 북, 해외
동포들은 모두 처음으로
통일이라는 것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았습니다.
저 역시 그때
탁구 통일팀을 동행취재하면서,
g통일은 이미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눈으로 볼
수도 있는 완료형이다h,
g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h고
하신 목사님의 말씀들이
실감적으로 떠 올랐습니다.
그와 같은 감동으로부터
미숙하나마 저의 첫
저서
w인간 문익환x도
세상에 나왔습니다.
책이 출판된 직후에
이제는 세상을 하직하신
아버지가
g어떻게 혼자서
이 많은 자료를
모았느냐? 수고 많았다h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 책을 펼쳐
보면서 내가 모우고
책으로 편집한 자료들
따위는 그중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인간으로서의 문익환을 소개하는
책으로서는 너무나도 조잡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했으며,
그럴수록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만나뵈웠던 박 장로님께서는
이것을 훌륭한 책이라고
칭찬해주셨으며
g감사합니다h고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날 저는 목사님
못지 않은 장로님의
넓으신 마음에 그저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책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싶어서 목사님께서 가석방되실
때마다 은근히 기대했었습니다만
끝내 그 소원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과
목사님의 통일염원에 대한
주변의 평판은 초기에는
g소영웅주의자h라느니,
g감상적 통일론h이라는 등 냉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전집이 출판된 사실이야
말로 목사님의 목소리나
주장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았습니까.
사실, 문 목사님께서
통일을 외치셨던 그때
그때 상황을 돌이켜
보면, 통일에 대한
사람들의 열의가 높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통일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지거나, 심지어 범죄시되는
것과 같은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여섯번이나 투옥되신
일을 생각하면 힘든 상황이 더
많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통일염원에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관용의 마음과 동포애가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동포애가 목사님을
기도회나 강연회뿐 아니라
위험한 집회장이나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투쟁마당은
물론, 사람들이 멀리
하는 빈민가, 나아가서는 분신자살을
한 사람의 불에
탄 시체 곁에까지
가시게 떠밀었습니다. 또한 목사님으로
하여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고귀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름을
분노와 슬픔을 담아
g 열사여!h라고 절규하시게
했습니다.
또한 그 관용의
마음이 목사이심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앞에서 합창하고 승려들을
숙연하게 하셨으며, 평양에서는 북에서
영웅이라면 민족의 영웅이라고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시고 사람들을
감동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행동들이
남녘은 물론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이해와 지지를 왜
받지 못하겠습니까.
유감하게도 한때는 그렇게도
높아갔던 통일기운이 같은
해에 목사님과 김
주석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에로
후퇴해서 식어버렸습니다.
더 슬프게는 한때는
통일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분열되고 일부
통일운동단체는
e불법단체f의 딱치가 붙고
통일운동 내부에서까지 사람들이 멀리하는
상황입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g실패작으로
해서는 안된다h고 하셨던
문민정부는 북의 붕괴만을
꿈꾸다가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이남의 경제를 파탄상태에로
몰아 갔던 대실패작으로
끝났습니다.
그후 한때는 3.1민주구국선언에 목사님과 함께
서명하고 언제나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어 지금의
국민의 정부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북을 적대시하고
통일운동을 범죄시하는
e국가보안법f은
그냥 남아 있고
그 집행기관이나 같은 안기부도
e국가정보원f이라고
이름만 바뀌고 그냥
존속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정부가 북을 어디론가
유도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제대로
된 대북정책으로 나가기를 기대하면서
좀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생전에 자주, 민주,
통일을 하나로 보는
통일론을 김 주석님
앞에서 피로하시고 남북이
함께 승자가 되는
통일을 주장하며 지향해
오신 목사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그러나 목사님, 지금의 상황이
결코 다 비관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작년 말부터 경제,
언론, 학술,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남북의 민간교류가 활발해지고
그것이 금강산관광의 실현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녘의
일반 동포들이 북에
있는 금강산을 찾아서
천하절승을 배경으로
e우리의
소원은 통일f 노래를
북의 동포들과 함께
합창했습니다.
만약에 목사님께서 계셨으면
틀림없이 박 장로님과
함께 그 자리에
계셨을 것입니다.
어머님 김신묵 여사께서
돌아가셨을 때 박수로
보내달라던 고인의
유언데로 목사님과 함께
춤을 추셨던 시인
고은씨도 금강산을 찾아서
g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자h고 통일을 절절히
바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습니다.
이러한 교류가 통일에로
이어질 것을 겨레는
모두 염원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도 염원하셨던
1995년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는 20세기도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분단이 고착화되거나
통일을 외치는 목소리가
사라져서는 안된다고하시는 목사님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으면서
미력하나마 노력해 나갈
생각입니다.
편지가 좀 길어졌습니다.
필력의 미숙함을 뉘우치면서
이만하겠습니다.
생각할수록 아쉽고 원통합니다.
목사님께서는 평양의 학생소년궁전에서
광주에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는데 우표를
붙여도 못보낸다고 안다까워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셔서
g그
편지 나 줘,
광주에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전해줄게h라고 하시며 아이들을
꽉 끓어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가 쓴 이
편지는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지.
1999년
1월 18일
문익환
목사님의 5주기에
¦w통일평론x
1999년 3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가필했음
@
강민화님
1999.3.1
80년전 오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생각하며 옷깃을
여밉니다.
2월 25일 금강산에서
도라오니 보내주신 편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92년에 귀한
책을 볼 수
있었는데 감옥에는 드려보낼
수가 없었고 93년 나오신
후에 문 목사가
보셨을텐데 인사를 못드리고
떠나셨군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lŌ
¶vą
을
뒤지며 고마워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다섯부나 더 가지고
왔었는데요.
미안합니다. 그동안
너머 무심히 지내서
무엇 하나 보내드리고싶어서c문
목사님
중에서
좋아하시는 시를 골라
족자 혹은 액자로
만들어 보내고싶은데요. 많은
젊은이들이 애송하는
g꿈을
비는 마음h을
원본을 보냅니다.
목사님께 보내는 편지를
읽고 감격하였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g통일맞이
늦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h은
이제 사단법인 인가를
얻어 활발히 일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협의회
초청으로 금강산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하고 왔는데 시인은
아니지만 즉흥시를
보내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이 계셨으면
좋아하셨겠지요.
아쉽습니다.
봄길
박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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