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기고z분파와 파쟁이 진보운동에 남긴 사적 교훈

 송현우(현대사연구가)

  

얼마전에 대동연구소 사이트에 대선후 한국에서 일어났던 민주노동당의 분열사태와 관련한 두편의 시평이 게재된 것을 보았다.

필자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몹시 우려하는 한사람이지만, 자칫하면 한국의 특정 정당 내부 문제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 것 같아서 논평을 망설여 왔었다. 그러나 때 마침 시평을 통해서 재일동포사회에도 함께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글을 쓰기로 했다.

필자는 시평들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현대사를 연구하는 한사람으로서 민주노동당의 분열(탈당과 신당 창당)을 주도한 사람들의 언행이 마치 우리 나라에서의 초기 진보·사회주의운동에 나타났던 분파행위나 파쟁을 보는 것만 같아서, 그같은 분파와 파쟁이 남긴 역사의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각도에서 문제를 보고자 이 글을 썼다.

 

쟁끝에 해산된 1920년대 조선공산당

1920년대  초반, 당시 조선 에서는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노동운동의 발전, 또한 여러 대중단체의 결성 등 반일민족해방운동이 급속히 전진했다. 그러다가 1924년에 이르러 좌익진영의 주도하에 e조선동총동맹f, e조선청년총동맹f, e조선성동우회f, e조선형평사f와 같은 전국적인 통일조직들이 조직되었다.

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이같은 사상적·조직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노계급의 전위당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반일민족해방운동 발전의 요구이기도 했었. 에 따라 1925 4월에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

조선공산당의 창은 사조면에서신구교체와 민족해방운동의 질적 변화를 의미했으며, 그후 조선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청년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추동하게 되었. 이는 바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대중들에 대한 사회주의사상 보급과 노동운동, 나아가 민족해방투쟁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밑에 진행되게 된 역사적 새 단계에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1926년의 6.10만세운동과 같은 큰 규모의 반일투쟁을 지도하는 동시에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e신간회f(1927\31)와 같은 전선체를 내오고 반일애국량을 집시키는데도 기여했.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당 지도부내에서의 파쟁으로 말미암아 당된지  몇해도 안되던 1928년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제명처분을 받고 해산되고 말았.

조선공산당의 해산은 인테리학생에 편중되고 노동자대중속에 뿌리 내리지 못했거나 현실과 유리되어 사대주의, 교조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등의 조직·사상적 미숙성에기인지만, 주된 해당 원인은 심한 분파행위와 파쟁 때문에 지도부가 분열와해되어 대중을 이끄는 당의 위상과 기능을 상실한데 있었다.

이처럼 당이 사분오열된 혼란이 수습 못할 지경에 이르고 있은데다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으니, 조선공산당은 조직된 역량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끝마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기 사회주의운동의 대명사가 되었더 분파주의

위에서 본 것처럼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 해산의 주된 원인으로 되었던 분파주의이지만, 이는 사실에 있어서 조선공산당이 창건되기 전에 조선에 존재했던 사상단체들속에서 벌써 심하게 나타났었다.

1910 e한일합병f후 독립운동을 하던 일부 사람들이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는데, 그들은 1918년에 하바롭스크에서 e한인사회당f을 결성. 그러나 이 단체는 얼마 안가서 두 파로 나뉘어지고 그중 한 파는 1921년에 상해에서 e고려공산당f (세칭 상해파)을 만들었으며, 또한 파는 이르쿠츠크에서 나름대로의 e고려공산당f (세칭 이르쿠츠크파)의 간판을 내걸었다.

한편 당시 국내에서도 e서울파f, e화요파f를 비롯한 여러가지 파벌들이 생겨났.

e서울파f 1921년에 무어진 e서울청년회f가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돈을 배신자횡령것을 계기로 분열되었다가 나온 파벌인데, 이는 그후 다시 e서울신파f e서울구파f로 갈라.

e화요회f(세칭 화요파) 1922년에 결성된 e신사상연구회f를 모체로 해서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었다는데서부터 이름을 이렇게 달고 1924년에 생겼.

또한 1923년에 일본에서 e북성회f를 결성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일부가 귀국해서 1924년에 e북성회f의 국내조직으로서 e북풍회f(세칭 북풍회파)를 내왔는데, 1925년에는 e북성회f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파벌로서 e일월회f(세칭 ML파의 전신)라는 것이 생겼.

초기 사회주의운동내에서 발생한 분파주의가 에 죄행을 기록한 첫 사건은 e흑하사변f.

1921 1월 중국경지대의 흑하 연안에 있는 자유시(쓰와보드늬)일대에 홍범도의 e대한독립군f, 최진동의 e총군부f, 김좌진과 서일의 e북로군정서f 등 독립군 부대들이 군력 통합강화를 명분으로 집결.

그러나 지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민족주의 상층부의 심한 알륵 때문에 형세는 통합은 커녕 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를 막후에서 부추긴것이야말로 코민테른의 파견원과 러시아 원동정부를 각기 등에 업은 e이르쿠츠크파f e상해파f였다. 그들은 독립군 부대들에 침투하고는 저마다 영향력을 확보해 보려고 서로 반목질시하며 공격했었.

이같이 해서 벌어진 독립군부대들의 암투는 이 해 6월에 끝내 무력충돌이라는 참극을 빚어내었. 결국 흑하를 피로 물들이면서 벌어졌던 동족상쟁은 러시아 적위군 개입진압을 받게 되었으며 일제는 이같은 사태에 대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고 한다.

파벌의 대립과 갈등은 조선공산당 창 이후 그 지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화된다. 그것은 창이 주요파벌 하나인 e서울파f가 무시된채 e화요파f를 중심으로 배타적으로 이루어진데서 비롯되었.

분파주의자들은 당의 노선이나 진로모색을 둘러싼 정견차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권력욕과 공명, 출세욕 때문에 제가끔 열과 야합을 거듭하면서 추악한 파쟁을 일삼았던 것이. 들은 이 과정에 제각기 e당중앙f을 자처하면서 국제당에 e대표f를 파견하고는 자기들이야 말로 e정통f다른 파들은모두 사기협잡꾼들이라고 중상모해하기까지 했으며,  온갖 사기협잡과 권모술수에 매달리다 못해 나중에는 깡패처럼 서로 치고 받는 추태까지 보였.

이같은 파쟁은 이 해산되기 전에는 당권파 e서울파f, 또한 e화요파f eMLf 사이의 당내다툼으로서 벌어졌으며, 당이 해산된 후에는 e서상파f(서울파와 상해파의 합동파) e화요파f, e엠엘파f 등이 분파활동을 경쟁적으로 벌.

이처럼 분파주의와 파쟁은 우리 나라 초기 사회주의운동의 결함을 규정했던 본질적 요소로, 이 운동의 대명사처럼 .

 

파쟁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의 온상

분파주의와 파쟁은 사상·이론면에서도 우리 나라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막심한 해독을 끼쳤다. 그들은 한마디로 사회주의 사상과 론을 반대파에 대한 공격도구로 여겼던 것이다.

들의 론과 선은 몇개의 념적 틀속에 고착되었다. 하나는 사대주의인데, 이는 주로 코민테른과의 관계서 나타났.

그들은 우리 나라 실정을 전혀 고려함이 없이 코민테른의 지시라면 절대시하고 맹종했을뿐 아니라, 코민테른의 권위를 자파의 권위를 돋보이고 반대파를 제압하는데 이용했었다.

코민테른 제6차대회(1928)에서 마주쳤던 eMLf e4차 조선공산당f 대표와 e서울파f e춘경원 공산당f 대표가 감자로 만든 도장을 찍고 날조한 문서를 들이대면서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고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구걸하는 추태를 보였던 일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흔히들 사대주의민족허무주의표리일체의 것으로 일컬어진. 분파주의자들은 e민족f, e민족애f, e배달겨레f와 같은 것은 다 추상적 관념이며 그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계급의식을 모호하게 만들고 사회주의운동을 교란시키려는 행위라고 배척했. 요컨대 민족의식을 거나 민족문제을 주장하는 것은 계급적 원칙에 어긋나므로 철저히 배격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자기 조국도 민족도 몰라본다고 하는 오해는 아마 이런 일 때문에 생기지 않았을까.

그들의 이같은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는 또 하나의 념적 틀인 교조주의와 결부되.

우리 나라 사와 현실을 외면하고 코민테른의 결정과 지시를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분파주의자들의 사고에서는 응당한 결과로서 교조주의가 고질화되었는데, 이는 노선면에서의 일관성 없는 좌우경적 편향으로 나타났었다.

그들은 한때 e민족해방운동우선론f, e총체적 무산자론f을 제창하면서 계급적 장을 포기하고 청산주의로 전락되었는가 하면, 그후 다시 e계급투쟁우선론f을 제창하면서 민족해방의 과제를 사실상 부정하는 계급지상주의에로 돌변하기도 했었. 는 그들이 자기의 사상·이론적 및  전략전술적 기초를 갖지 못하고 그 누군가의 지령에 따라 우와좌왕하기만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우리 나라 초기 사회주의운동에서 나타난 분파주의는 사회계급적으로 볼 때 동운동에  침습한 부르아 사상의 발현이며, 사적으로 볼 때는 과거 봉건지배층안에 극심던 당쟁이나 부르아 민족주의운동안에 발생한 각양각색의 분파들의 싸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사상적 근원은 개인영웅주의 공명출세주의이며 그 상습적인 수법은 벼슬다툼과 , 간교한 외교술과 모해, 개인에 대한 환상의 전파와 부식이. 그런 그들이기 때문에 자기 야욕을 충족시킬 수 없게 되명색상의 사회주의운동마저 줴버리고 어제까지 몸 담았던 조직에서 이탈하거나 동지를 버리거나 배반하는 일을 주저함이 없이 저지르게 되고, 심지어 일제의 앞잡이로 투항변절하기까지 했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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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우리 나라 초기 사회주의운동에서 나타났던 분파주의에 대해서 상기할수록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주도한 세력의 주장이나 행보가 자꾸 오버럽했었다. 그같은 유사성을 느낀 것은 과연 필자뿐일까?

사는 민중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진보의 본의가 있고 자주와 단결이야말로 운동의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다. 같은 역사의 교훈 앞에서는 그 누구나 겸허해야 할것이다.

2008.3.19

 

¦이 글의 원본은 일본어로 씌여졌으며 이를 대동연구소에서 번역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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